(부제: 주거공간은 모름지기 라텍스마냥 내 몸에 딱 맞아야지)




며칠 전 집주인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지금까지 일년도 넘게 잘 살아온 나의 보금자리를 떠날 시간이 된 것이다.

평소 와츠앱으로 간간히 연락을 주고 받다가 이건 예의가 아닌 듯해서 전화를 걸었다.

집주인은 "그래서 지난달부터 집세를 안 낸 거였니?" (보증금은 두달치 월세) 라고 물었고 

내가 "예아" 라고 대답하자 그는 핫핫핫 웃었고 나도 어쩌다 보니 같이 웃었다. 

"이 집은 정말 좋은 집이고 난 여기 사는 동안 행복했어. 다음 달에 짐 빼면 보자." 그렇게 우리의 관계는 끝이 났다.



홍콩에서 생활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룸메이트 없이 혼자 살게 된 나의 집. 

가구며 가전이 모두 세팅되어 있어 몸 (+짐)만 들어오면 되었던 집.

시 중심부에 있는 회사와 5분 거리에 위치했음에도 깨끗하고 비교적 조용하며 가격이 경쟁력 있었던 집.

거기다가 무려 400여 스퀘어 피트인 집. (약 11평쯤 된다)

하루 종일 알몸으로 뒹굴어도 뭐라 할 사람이 없는 집.

고양이 주인님의 오줌찌린내를 가지고 눈치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집.

설거지를 x일 미뤄도 나한테 욕할 사람 없는 집.



이런 퍼펙트하고 엑설런트하며 아이딜한 집을 놔두고 왜 또 나는 짐을 싸야 한단 말이냐. 

이 거역할 수 없는 유목민의 운명인가.

바로 집세 때문이다.이놈의 집세 때문에 돈을 모을 수가 없다.

별다른 스킬이 없는 데도 불구하고 상당히 자비로운 월급을 받고 있으나 그 중 1/3이 월급으로 나간다. 

이게 거의 돈백만원이다. 아까워 죽겠다.

그래서 다시 집을 찾기 시작했다. 



사실 어디서나 이사를 하고 집을 찾는 과정은 피곤하다. 하지만 여기서는 분노를 일으킨다. 

건물들은 낡아빠졌으나 안에는 깔끔하게 고친 곳도 있어 아파트에 들어가기 전까지 전혀 알 수가 없다. 

항상 긴장을 늦출 수가 없는 것이다.

고시원같은 방을 보여주면서 월세 백만원을 넘게 받으려고 하다니 

집주인은 도둑놈 심보같으며 부동산 에이전트는 원망스럽다.

보통의 이런 "스튜디오"는 보통 180 스퀘어피트 정도인데 평수로 환산하면 5.06평이다.

이런 방을 방세를 7-8,000 HKD를 받으니 이런 양심리스한 경우가 또 없다.

게다가 원래부터 원룸식으로 지은 것도 아니다. 

그냥 넓은 (홍콩 기준으로) 집을 쓱쓱 판자를 끼워 넣어 조각낸 것 뿐이다.

짜증이 솟구친다. 그래서 그나마 넓은 주방과 거실을 공유할수 있는 플랫셰어를 찾아본다.

또 다른 차원의 짜증을 만나게 된다. 



이전부터 지금까지 홍콩에서 플랫셰어를 찾을때 사용한 웹사이트들이다:

http://www.weeklyhk.com/jang.php?id=rent&mode=list (홍콩 한인 신문 웹사이트의 생활광고 페이지 - 첫 숙소를 여기서 찾았다)

http://hongkong.craigslist.hk/search/apa (두번째 플랫셰어를 여기서 찾았다)

http://www.easyroommate.com.hk/ (플랫셰어용 사이트. 가끔 원룸 매물도 나온다)

https://geoexpat.com/classifieds/apartments (홍콩주재 외국인들 포럼)




요새는 크레익스리스트나 익스팻 포럼들에서도 하도 에이전트들 글이 많아서 

(에이전트 글=복비를 지불해야 한다) 이지룸메이트 위주로 봤다.

위치도 현 집/사무실과 같은 동네이고, 인테리어도 깔끔하며 가격도 나름 착한 곳을 찾아서 

집주인과 서로 소개를 하며 메일을 몇차례 주고받았다. 집도 좋아 보이고 사람도 좋아 보인다. 

나는 왜 이렇게 운이 좋은 걸까.

집주인이 50대 올드 미스인데 일때문에 영국으로 파견을 나가야 해서 직접 살던 원룸형 아파트를 세 놓으려 한단다.

그런데 영국에 있으니 집을 어떻게 보나? 그래서 이런 이메일을 보내 주는게 아닌가.



[발번역] 집을 보지 않고 어떻게 계약을 하겠어? 다 이해해. 

난 영국에 있고 넌 홍콩에 있으니 Skrill이라는 에스크로우 회사를 통해 넌 집세 (+한달 보증금)을 입금하고 

난 열쇠를 보낼께. 네가 열쇠를 받은날부터 14일간의 기한이 있으니 그동안 집을 보고 

마음에 들면 그대로 살고 아니면 열쇠를 다시 보내면 에스크로우 회사에서 돈을 돌려줄거야. 동의하면 계약서를 보낼께.



뭔가 이상하다. 에스크로우 회사라고? 이런 경우는 처음 들어 보는데.

일단 이 Skrill이라는 회사부터 구글링해봤다. 

아니나 다를까. escrow-fraud.com 이라는 웹사이트 포럼의 월세 관련 사기 스레에서 

이 "집주인" 이 보낸 이메일과 거의 동일한 스크립트가 나온 것이다. 

구글 검색 첫페이지 2번째 결과에 나오는 스크립트를 거의 그대로 사용한 사기꾼과

그리고 또 멍청한 사기꾼의 떡밥에 걸려 장문의 자기소개 이메일을 성의있게 보낸 내가 너무도 한심했다.

물론 돈을 안보낸게 어디냐. 하지만 시간=돈이기에 결국에는 분노가 치밀었고

유치하게 사기꾼에게 답 메일로 아래 짤을 보내주었다. 홍콩에서 집찾기가 이렇게 지랄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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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h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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